[추니박의 인도 여행기]오르차의 해돋이를 보며 나는 나를 뒤 돌아 본다⑧

기사입력 : 2020-04-02 1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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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성이 보이는 오르차 전경, 종이에 펜, 2001 / 그림=추니박
[아시아아츠 = 글 그림 추니박]
새벽에 일어나 큰 성이 보이는 반대편 성으로 해돋이를 보러 갔다. 오르차의 많은 성들 중에 호텔로 사용하는 쉬시마할 이외 나머지 성들은 규모가 크고 멋들어진 건축물인데도 불구하고 다 버려진 상태로 폐허처럼 남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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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살 인도 청년, 종이에 펜, 2001 / 그림=추니박

우리가 성에 도착하니 이른 아침부터 성 앞에 한 8살쯤 돼 보이는 소년이 기다리고 있다가 성의 지붕으로 올라가는 길을 안내해주겠다고 해서 따라 올라갔다. 성의 입구는 X자로 나무를 대고 못을 박아 막아서 우리는 벽이 일부 뚫려 있는 곳을 통과해 성안으로 들어가 아주 좁고 기다란 계단을 걸어 옥상으로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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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으로 올라가는 길, 종이에 먹, 2001 / 그림=추니박

만약 중간에 내려오는 사람을 만난다면 한 사람이 뒤로 돌아가 모퉁이에 마련된 조금 넓은 곳에서 서로 비켜가야 할 정도로 계단이 좁았다. 아마 침입자들을 막기 위해 그런 방식으로 만들어진 듯했다. 그 계단을 올라 옥상에 도착하니 소년이 아무 거리낌 없이 돈을 달라고 했다. 하하하 이 녀석 아침부터 알바를 하고 있었던 거다,,, 나는 5루피를 주고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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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위에서 맞는 해돋이, 종이에 먹, 2001 / 그림=추니박

해가 뜨기 전 어스름한 성의 옥상 난간에 걸터앉아 담요를 둘러쓰고 붉게 물들어 오는 동쪽 하늘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으니 왠지 슬프고 눈물도 나고 마음이 이래저래 싱숭생숭했다. 수도가 얼어 터진 집에 두고 온 가족들도 그립고 화가로써 막막한 삶을 살아가야 하는 내 처지도 처량하고 동양화를 그려서 이 시대를 살아갈 수 있을까 하는 나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서도 많은 의구심이 들었다.

화가란 그 시대를 이끄는 어떤 정신적 리더 같은 존재이기도 한데,,, 나는 과연 전쟁과 기아 환경 문제로 몸살을 앓는 이 암흑 같은 시대에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가!라는 질문도 나 스스로에게 수도 없이 던져보았다.

대학원을 졸업하고 지난 몇 년간 나는 세상의 사건, 사고, 종교 갈등 그리고 각종 이슈에 집중된 작품을 나름대로 해왔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그 주제에 빠져 작업하는 몇 년 동안 나는 정신적으로 더 힘든 시간을 보냈던 것 같다.

이제 30대 중반을 지나가는 나이가 되고 보니 그 주제들을 가지고 작업을 이어가면서 과연 내 가족의 생계를 책임질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들기도 한다.

나의 고뇌와 뼈저리게 절실한 예술가로서의 피 터지는 외침을 세상이 그다지 귀 기울려 주지 않으니 내 예술에 대해 나 스스로 많이 의기소침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제 2000년대를 살아가야 하니 나는 내가 오랫동안 즐겁게 혹은 집요하게 붙들고 갈 수 있는 나만의 예술을 찾아야 할 때이다. 그래서 지금 내가 이 거대하고 놀라운 인도라는 나라에 와서 나를 들여다보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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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진 성이 있는 들판, 종이에 펜, 2001 / 그림=추니박

성위에서 맞는 오르차의 해돋이는 드넓은 들판과 숲 사이 여기저기 울쑥불쑥 솟아있는 크고 작은 성들이 아침부터 들려오는 이슬람 음악과 어우러져 문장으로 표현하기 어려울 만큼 감동적이다. 성 아래 도시의 골목골목엔 그 시간부터 많은 사람들이 집집마다 앞길을 쓰는 모습이 보인다. 그래서 인도는 하루 종일 길거리가 더럽다가도 아침이면 깨끗해지나 보다.

이 사람들은 아침 일찍 이면 모든 사람들이 집 청소를 한다. 그리고 하루 종일 쓰레기를 바닥에 버린다. 어찌 보면 아주 현명한 방법 같기도 해서,,,,조금 혼동될 정도다. 며칠 전 기차역 앞 가게에서 물건을 사고 껍데기를 버려달라고 하자 그 주인이 웃으면서 밖으로 휙 던져버렸다.

새벽의 시원한 공기와 안개에 몸을 숨긴 흐릿흐릿한 풍경, 언덕과 들과 성과 마을이 어우러진 오르차의 풍경 위로 은은하게 붉은색으로 떠있는 고요한 태양은 한낮의 뜨거운 인도 사람들의 열정을 잠시 보듬고 있는 듯하다.

카메라가 아닌 눈으로 세상을 바라봐야 진실을 볼 수 있듯 나는 성 꼭대기 난간에 걸터앉아 그 광경을 오래오래 기억하려고 노력했다.

우리는 해돋이를 보고 아침 일찍 사거리 2층 숙소 맞은편에 있는 작은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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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라자 레스토랑, 종이에 붓펜과 펜, 2001 / 그림=추니박

어제 도착하자마자 식당 앞에 한글로 김치볶음밥이라고 붙어 있는 것을 보고 반가운 마음으로 김치볶음밥을 먹었는데 양배추 김치를 볶아 만든 볶음밥이 너무 짜서 먹을 수가 없었다. 주방장을 불러 한국요리를 어떻게 아느냐고 물었더니 여행 온 한국인에게 배웠다고 했다. 나는 어떻게 해야 적당한 간을 맞출 수 있는지 한국인의 입맛에 대해 설명을 해줬다.

덕분에 우리는 간이 잘 맞은 김치볶음밥으로 아침을 먹고 오늘은 들판에 널려있는 작은 성들을 구경하러 가기로 했다.

2001.1.27. 오르차 람라자 레스토랑에서 아침을 먹으며

인도는 정말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너무나 많다. 아무리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엄청난 것들이 그냥 일상 속에 묻어 있는 것 같다.

아침을 먹고 나는 일행 넷과 함께 오르차 시내와 가까운 근교의 성을 구경하러 갔다. 사거리에서 장이 열리는 작은 광장을 지나 똑바로 걸어 가보기로 하고 무작정 흙길을 걸어갔다.

흙으로 지은 서민들의 집은 중세시대 천민들이 살던 환경과 같아서 길을 걸어가는 내내 옛날 영화 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았다. 겨울이라 할 일이 없는 탓인지 남자나 여자나 집 앞에 멍하니 앉아서 지나가는 관광객들을 구경하는 일이 하루 일과의 다 인 듯했다.

환경이야 어떻든 사람들은 관광객들에게 아주 호의적이라 인사도 밝게 하고 가끔 차를 마시고 가라고 붙드는 사람들도 있었다. 나는 그 사람들의 끝을 알 수 없는 친절함과 행복한 미소를 이해하느라 애쓰고 있다. 앞뒤가 다른 인도 사람들을 조심하라는 얘기를 많이 들어서 늘 경계를 하게 된다.

우리는 쵸우민(인도의 쌀 종류)을 기르는 파릇파릇한 논과 밭을 지나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성들을 찾아다녔는데,,, 거의 모든 성들이 마구간이나 창고로 사용되고 있었다. 어떤 성은 소똥 냄새가 너무 나서 들어가 볼 수도 없었고 어떤 성에는 독수리가 너무 많아 위험할 정도였다. 가끔 소에게 먹일 마른풀만 쌓아 놓은 성에 올라가 근처의 풍경을 구경하는 일은 아주 즐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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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벽화가 그려진 템플, 종이에 펜, 2001 / 그림=추니박

작은 성들은 경비 초소로 이용됐는지 뾰족한 성탑 위로 올라가는 계단을 오르면 확 트인 신작로나 강변을 감시할 수 있는 방향으로 발코니가 있는 창이 나 있었다. 나는 가는 성마다 섬세한 펜으로 그림을 그렸고 그때마다 일행들은 일기를 쓰거나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며 함께 시간을 보냈다.

규모가 있는 성안의 벽에는 아주 화려하고 묵직한 굵은 선으로 그려낸 회화 같은 벽화들이 그려져 있었는데 그 느낌이 현대적으로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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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차 허름한 정자에 그려진 벽화, 회벽에 채색, 년도미상 / 사진=추니박

어떤 작은 정자 같은 성에는 고구려 고분벽화에 나오는 인물들과 비슷한 포즈와 복장을 한 그림이 있어서 혹시 인도와 고구려가 어떤 교류를 했던 연관이 있었을까 하는 의구심을 갖게 했다. 인도의 작은 마을 벽화에서 우리 조상들의 모습을 느낄 수 있는 그림을 만나다니 세상은 참 재밌는 일이 많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우리는 마을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언덕 위의 성까지 걸어가 끝없는 벌판으로 지는 해를 보고 어둑어둑 해진 길을 걸어 숙소로 돌아왔다. 희미한 전등이 비치는 집안에서 저녁을 먹는 집집마다의 다양한 풍경을 보면서 돌아오는 길이 낯설었지만 행복했다. 아들과 와이프가 보고 싶은 저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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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차의 성뒤로 지는 해, 종이에 펜, 2001 / 그림=추니박


내일은 함께 왔던 일행 모두가 오르차를 떠나 둘은 카주라호를 들러 바라나시로 가서 그룹과 합류를 하고 나머지 둘은 자신들이 원하는 곳을 향해 떠나기로 했다.

다들 알아서 척척 여행의 맛을 찾아가는 걸 보니 여행은 모든 사람에게 독립심도 키우고 용기를 갖게 해주는 힘이 있는 것 같다.

나는 며칠 더 이곳에 머물며 혼자만의 시간을 갖기로 했다.

이제 진짜 인도라는 낯선 나라를 혼자 여행하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내일은 또 어떤 일이 나를 기다릴까!

2001.1.27. 오르차의 숙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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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니박의 인도 여행기] 글·그림 추니박(아티스트 박병춘)

소나무를 잘 그리려면 꼭 알아야 하는 가지의 구조 / 영상=추니아트 유튜브

추니박(박병춘)은 홍익대학교와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2015년 베니스비엔날레 특별전을 비롯해 32회의 개인전과 200여회의 그룹전에 참여했다. 2000년부터 산수풍경시리즈를 시작하고 그동안 독특한 작품을 발표해 화단의 주목을 받았다.그는 2010년 중앙일보 주최 평론가가 뽑은 3040작가 10인에 선정되기도 하였고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등 많은 미술관에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현재 유튜브 채널 ‘추니아트’로 미술 애호과들과 소통 중이다.

chang@asiaarts.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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